'시'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08.03.05 :: 그리움 (14)
  2. 2008.01.23 :: 다시 쓸쓸한 날에 (14)
  3. 2008.01.19 :: 나무가 되는 법
  4. 2008.01.17 :: 꿈의 모서리가 뭉툭해지는 날은 올까 (8)
  5. 2008.01.14 :: 소네트
  6. 2008.01.14 ::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7. 2008.01.14 :: 순간 - 문정희
  8. 2008.01.11 :: 하루 (14)
  9. 2007.12.28 ::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 (12)
  10. 2007.12.12 :: 공존의 이유 (2)
daydream 2008.03.05 17:19




보거든 슬뮈거나 못 보거든 잊히거나

저 나지 말거나 내 저를 모르거나

찰하리 내 먼저 죽어서 저 그리게 하리라



- 고경명 (1533-1592)








슬뮈다 :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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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그리움,
daydream 2008.01.23 00:11



다시 쓸쓸한 날에

강윤후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세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이나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

쑥뜸 떠 독기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래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노래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을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끊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얘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바짝바짝

퉁명스레 말라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에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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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강윤후,
daydream 2008.01.19 00:42


나무가 되는 법


성기완




갈 수 없는 곳을 가는 법을 가르쳐줘
더 그보다 더 좋은 곳을 내게 알려줘
막 눈을 뜬 저 목숨엔 뭐가 보일까
사랑이 날 가두어 두는 건 왜인지
추억이 날 멈추게 하는 건 또 왜인지
난 언제 어느 골목을 돌아서다
널 보고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제발 그렇게
그렇게 되기를 제발 그렇게
그런 망각을 내게 줘
사랑이 날 가두어 두는 건 왜인지
추억이 날 멈추게 하는 건 또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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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2008.01.17 11:54





꿈의 모서리가 뭉툭해지는 날은 올까 

   
정 영 선 




강진 옛 가마터를 빠져나온 도자기 파편 하나
깨어졌음에도 아직 이름을 달고 있다
'청자상감운학무늬병편'
흙 속에 파묻힐 때 이름도 묻혀
넓은 그늘의 나뭇잎을 틔울 생각에 겨웠을 그
다시 햇빛 속으로 끌려나와
조각난 구름을 타고 날개가 잘린 새가 절름거리는
부서진 몸에 다시 담은 완전에의 꿈
처음 도공은 꿈을 살았으나
나중 꿈이 도공을 살았으리
어떤 천형을 받은 것들은 제 꿈 아니면
남의 것을 덤벙 덮어쓰고 평생 앓는 것을 알겠다
절름거리는 저 새가 실어 나르는
꿈꾸는 자는 죽어도 대대로 살아남는 꿈
올라타고 갈 자를 찾고 있다
고삐를 조일 자를 찾고 있다
꿈에 시달려본 자만이 아는 통증으로
파편의 모서리가 내 가슴을 찌른다
찔리면서도 한 발짝을 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내 꿈의 오리무중을
유리 진열장 속에서 울음을 반짝이는 저 파편이 꿰뚫는다

서 있는 것들이 모두 꿈의 무게로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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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전영선
daydream 2008.01.14 23:11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더 절으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하며...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

그대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담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아는 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나는 나 자신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으므로.







_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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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2008.01.14 22:51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 이상희    




세상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야

쉬잇 내 말을 들어봐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야

다.시.는.돌.아.오.지.않.는.다

다시 돌아와도 찾을 수 없도록

도와줘 데이지, 내 얼굴을 먹어줘

내 의자와 찻잔을,

이름과 구두를 삼키고

동그란 꽃봉오리를 단단히 오므려버려

숱한 풀꽃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새 주소에도 검은 새 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뿌리없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창문을 열면 녹슨 모래 언덕이 무너질 듯

데이지, 그런데 난 돌아오고 싶을거야

야수와 포옹할 미녀를 기다리며

끝없이 기나긴 불안의 끄나풀이 되고 말거야

도와줘 데이지,

돌아올 수 없도록

내 생의 사진들을 먹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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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2008.01.14 21:12




순 간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언제나 한발 늦는 나를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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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2008.01.11 23:43




하루

  천 양 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
광수생각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처음 봤었다.
보자마자 푹 빠져서 수첩에 오려놓고는
때때로 읽으며 위로받곤 했었는데.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님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다시 이 시를 보게 되었다.



내가
참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같아서
나는 오늘도
그 거짓말로
나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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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2007.12.28 00:45



키스키스키스


신현림



   떠드는 말이 부딪쳐 상처와 이별을 만들고,
   따뜻한 수증기로 스미면 마음의 키스가 되지
   키스, 키스, 키스! 번역해서 뽀뽀는 얼마나 이쁜 말이니.
   삶이 아프지 않게 시원하게
   말은 사려깊은 타월이 되야지

   매순간 모든 이로부터, 버려질 쓰레기까지
   뽀뽀하는 마음으로
   "네 일은 잘 될 거야 네 가슴은 봄바다니까"
   인사하는 바로 그것,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














오래간만에 이 시라도 읽고
기운 좀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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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2007.12.12 18:07




공존의 이유

조병화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오면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약속을 합시다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시인에게 간절히, 묻고 싶었다.

어째서 우리는 잊어도 좋을 약속 따위를 하며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해야 하는 거냐고.
하늘과 가까워지는 날이 오면
공존의 이유를, 그 까닭을 알 수 있는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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