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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3 :: 다시 쓸쓸한 날에 (14)
daydream 2008.01.23 00:11



다시 쓸쓸한 날에

강윤후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세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이나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

쑥뜸 떠 독기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래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노래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을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끊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얘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바짝바짝

퉁명스레 말라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에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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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lo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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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blog.daum.net/truewriter BlogIcon true

    중반부까진 왠지 공감 팍팍 하며 읽다가.. (왠지 저와 어머니와 비슷한듯 해서...ㅎㅎ)
    끝에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 했어요^^

    쪼개지리라..
    갑자기 실험적인 어떤 애니메이션이 생각났습니다..
    빌 플림턴이던가..;;
    ㅎㅎ

    좋은 하루 보내셨겠죠?^^

    2008.01.23 00:59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clozer.tistory.com BlogIcon clozer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해 추억에 대해
      되돌릴 수 없는 감정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true님도 좋은 하루 보내셨죠?

      2008.01.25 03:05 신고
  2.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echo7995.tistory.com BlogIcon 에코♡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 내리 찍으면 쪼개지리라.

    어쩜 이런 표현을 ~

    2008.01.23 01:33 신고
  3.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shain.tistory.com BlogIcon Shain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군요..
    벌레들 마저 죽기전에
    낡은 구두라도 닦고 마당을 탈출해야할텐데요 ^^

    2008.01.23 02:22 신고
  4.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jbreathe.tistory.com BlogIcon 브리드

    보통 긴 시는 공감하지못하는편인데
    이시는 읽는 내내 맘에 와닿네요.

    영화 한편을 본듯한 느낌.

    2008.01.23 06:58 신고
  5.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www.fantasticlara.net BlogIcon 섬연라라

    끝에 반전이 있네요. ㅎㅎ

    2008.01.23 10:27
  6.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mepay.co.kr BlogIcon mepay

    어설픈 영화보다 훨씬 좋은 시 입니다..

    2008.01.24 20:13 신고
  7.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purepure.tistory.com BlogIcon 고군

    인생의 절망을 노래한듯한 시 같아요..
    여기서 끝낼것인가..아니면 다시 시작할 것인가

    2008.01.25 01:10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