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던 것일까. 나는 <행복>을 보면서 정말 어떻게 끝을 낼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결론에 이르려고 하는 건데.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의 반응을 너무나 쉽게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들이 마지막에 어떤 인식의 결론에 이르는지 그것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는 공들여 쌓은 중반부까지의 리듬을 깨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지우기 시작한다. 나는 이 점이 <행복>의 다른 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다음 상황이나 대사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결말이 정말 그렇게 끝날 것이라고 상상하기 싫었다. 나는 386세대의 무기력함이 싫다. 그들이 말하는 예정된 패배주의가 정말 싫다. 나는 그들의 다음 세대이고 그들은 나의 윗세대다. 나는 정말 그들이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들의 좌절된 현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기분이 상한다.

나와 띠 동갑인 20대 여조카는 저녁을 먹으면서 <행복>의 영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삼촌, 나는 영수가 마지막에 희망의 집으로 가는 것이 은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갈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가는 것 같아. 그렇다면 은희는 영수한테 뭐였을까. 영수는 정말 못된 놈이야" 조카가 정확히 본 영수란 캐릭터의 마지막 선택은 어린 조카보다 내가 더 불만스러운 상황었다.

어째서 허진호는 멜로드라마의 구원의 대상인 여자의 희생에 대해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것이 진부한 멜로의 공식으로부터 여성 캐릭터를 구원하는 40대 남자인 멜로 전문 감독의 반성에서 이뤄진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멜로 전문 감독의 꼬리표를 떼고 싶었던 감독의 불만 탓일까. 어쨌든 라스 폰 트리에의 지독한 멜로 드라마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의 베스의 죽음이 옳지 않다고 믿는 분들에게는 허진호의 <행복>에서 은희의 역할이 적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희의 역할이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한 자기애의 사랑으로 끝났을때 영수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 정말 걱정스럽기 시작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끝을 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한대수의 <희망의 나라로>가 울려퍼진다. 허진호는 자꾸만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다. <외출>과 똑같은 상황이 벌써 두번째 일어난 것이다. 그는 왜 엔딩의 완결을 거부하려 드는 것일까.


송해성의 <파이란>(2001)의 삼류 양아치 강재(최민식)도 보잘 것 없는 남자의 삶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파이란(장백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강재는 새 삶을 살려고 하지만 결국 조직/사회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한 여자가 힘겹게 살려낸 남자를 세상은 죽인다. <파이란>에서 이제 막 벗어난 최민식의 또다른 출연작 <꽃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역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구원을 얻는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구원은 이뤄지는 셈이다.

그러나 황정민의 영수는 다르다. 영수는 배우 황정민의 전작의 인물들을 골고루 닮은 인물이다. 이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아웃사이더 기질은 <로드무비>(2002)의 대식을 닮았고, 아내/애인를 두고 바람을 피는 속물스러움은 <바람난 가족>(2003)의 영작과 비슷하다. 그리고 시골 삶에서 병을 치료하는 과정속의 모습은 <너는 내운명>(2005)의 석중을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영수는 도시에서는 영작처럼 굴고 시골에서는 석중처럼 굴지만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는 대식처럼 군다. 결과적으로 이 남자가 나쁜 이유는 그 어떤 선택을 해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겉돌 수 밖에 없는 대식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남자들과 영수가 다른 점은 사랑과 행복의 절대성을 간직한 여자 은희로부터 받은 은혜를 거부하고 그것을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김기덕의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나쁜 남자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것을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자꾸만 가로막는다. 허진호는 영수라는 남자가 나쁘다고 하는데 황정민은 그에게서 인간애를 찾으려 한다. 아마도 <행복>의 영수의 마지막 선택이 이처럼 애매모호하게 남게 된 것도 허진호와 황정민이 보는 영수란 캐릭터의 차이가 하나의 결론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정민은 희망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는 <희망의 나라로>를 한대수의 노래를 깔면서 허진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무엇이든 왜 영수란 남자는 삶의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가. 멜로의 세계에서 나쁜 남자는 착한 여자를 만나서 결국 후회를 하게 되고 짐승에서 인간으로 구원받게 된다. 그것은 해묵은 고전 펠리니의 <길>의 잠파노와 젤소미나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내 운명>에서는 남녀의 역할을 바꾸긴 했다.)

허진호의 <행복>이 거부하고 있는 가장 믿기 어려운 점은 영수가 구원을 거부하고자 할때 은희 사랑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수는 은희를 좋아했지만 그 사랑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영수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나쁜 점이다.

물론 이누도 잇신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에서 정상인과 장애인의 사랑의 한계를 이야기하긴 했다. 츠네오(츠마부티 사토시)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떠나긴 했지만 그 사랑은 보존되고 있었다. 시한부와 장애인의 차이일까. 시한부 사랑이 가지는 특별한 극단성이 <행복>에서는 증발되어 있다.


<행복>에서 '희망의 집"의 기능을 살펴보자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이누도 잇신의 <메종 드 히미코>(2005)이다.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놓고 그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영수와 은희는 '희망의 집'을 벗어나서 시골집으로 향한다. 그것은 이안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의 낙원을 떠오르게 하는데 실제 <행복>이 가장 많이 카피한 영화는 <브로크맥 마운틴>이다. 설원에서 추방된 잭과 에니스의 사랑이 현실로 돌아오자 더이상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영수와 은희는 '희망의 집'을 떠나면서 그들의 사랑을 결국은 지켜내지 못한다. <브로크맥 마운틴>의 잭(히스 레저)와 에니스(제이크 질렌홀)의 상실된 사랑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그 사랑의 영원성을 지키려고 하는 어떤 인간적인 노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의 영수는 은희의 사랑에 대해서 지키려고 하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 영수가 은희를 떠나 서울의 수연으로 갔을때 그렇게 망가지는 것도 에니스를 떠난 잭의 모습과 유사하다.

영수와 은희가 아직 희망의 집을 떠나기 전 함께 치료를 받는 시기는 임수정의 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영군(임수정)과 일순(정지훈)의 오버랩된다. 그러나 박찬욱과 허진호는 희망이라는 화두를 두고 다른 반응을 보인다. 박찬욱은 미래를 위해 희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허진호는 희망의 나라로 가겠다고 말한다. 물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엔딩의 무지개는 희망적이다. 그러나 나는 은희의 과거가 자꾸만 변영주의 <밀애>(2002)의 미흔(김윤진)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골만으로 쫓겨온 신세인 미흔처럼 은희는 많은 것을 상실한 채 현재를 가까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수는 잭처럼 옷장에서 피묻은 낡은 남방을 꺼내들고 흐느끼지 않는다. 영수는 멍하게 은희의 염하는 과정을 보고 그들이 함께 사랑을 나눴던 그 낙원으로 올라가보기도 한다. 그것은 잭이 에니스를 위해 브로크백 마운틴을 다시 올라가지 않는 것에 비하면 놀랄만한 일이다. 마치 잭이 하고 싶었던 것을 영수가 대신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추운 겨울. 흰 눈이 쌓인 평야에 은희의 영정 사진과 화장해서 재로 변한 은희가 담긴 상자가 놓여져 있을 뿐이다.

"자신을 사랑했던 은희를 잃은 영수는 다시 희망의 집을 찾는다."

이 문장으로 소설이 끝났다면 아마 독자들은 많이 울었을 것이다. 나 역시 소설의 여운으로 남겨진 영수의 삶에 대해서 동정을 구했을 것이다. 마치 에니스가 떠나고 남겨진 잭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행복>의 엔딩이 되었을때는 이런 울림이 아예 거세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허진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감정을 배제한채 이성적으로 한대수의 <희망의 나라로>를 튼다. 멜로관객들이 카타리시스를 느껴야 할 대미에서 그는 울음 대신 희망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확신에 차지 않다. 그런 미묘한 망설임 때문에 사실상 <행복>은 하나마나한 영화처럼 보이게 되고 진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나는 정말 영수가 '희망의 집'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에게 다시 살 의지가 있는 것일까. 물론 영화 <행복>에서 영수가 은희를 만나러 오기 전 대중탕에서 피를 토하는 장면으로 그의 병이 위독해줬음을 암시해준다. 그러면 그는 정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또는 은희로부터 연장되었던 지난 일년간의 삶이 다시 죽음으로 바뀌었을때 그는 왜 '희망의 집'을 찾는 것일까. 그는 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은희가 남긴 사랑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그의 마지막 삶이 또 한번 연장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영수는 자신의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무엇을 깨닫게 될 것인가. 나는 영수한테 묻고 싶다. 너한테 은희는 무엇이었냐고.